Dialing you, Darling you
카테고리
작성일
2024. 9. 13. 20:38
작성자
Clockwork1overs

23.09.25 트위터

드레스를 입던 시절의 서양 어딘가를 배경으로 아가씨 서명은과 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은 화가 권준호… 라는 이야기를 치님과 짧게 망상했습니다만 너무 아름다웠어요
그런고로 여기에 길게 적어보겠습니다

준호는 화가입니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치거나 단독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화가는 아니고, 평범하게 의뢰를 받으며 주로 풍경화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예요. 그림을 그리는 게 생계 수단이자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열심히 그리고 또 그립니다. 위작만은 하지 않는다는 게 나름의 신조입니다. 그런 준호가 명은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의뢰를 받게 됩니다.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줬으면 좋겠다면서요. 거절할 이유 없는 평범한 의뢰이기 때문에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언제부터 방문하면 될까요?

그의 작품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모델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수가 적은 모델은 항상 있기 마련이죠. 피사체가 되는 행위가 낯간지럽거나, 그리는 이의 시선이 부담스럽거나,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힘들거나... 그런데 이 모델은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으면서 준호에게 말을 거는 법이 없었습니다. 먼저 말을 붙여도 간단하게 대답하기 일쑤였고요.

첫만남부터 범상치 않은 아가씨였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예절로 인사하고는 바로 제 자리가 어디인지 아는 양 미리 준비해둔 의자에 앉았거든요. 허리는 곧게, 손은 가지런히 모아둔 모습이 그대로 그려도 손색 없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준호는 자세를 고쳐줄 생각도 못 하고 캔버스 앞에 앉게 됩니다.

준호는 주일을 제하고 일주일에 이틀은 명은이의 저택에 가고, 나머지 나흘은 다른 의뢰작을 그리며 보냅니다만 점점 주일보다도 저택에 가는 날이 기다려집니다. 이 수상한 모델이 준호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요. 저택에 오면 집에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은 늘 같습니다.

사용인에게 응접실까지 안내받고, 준비를 마치면 명은이가 들어와 자리에 앉고, 자세를 잡습니다. 두세시간 그림을 그리면 그날의 진도는 그것으로 끝. 잠깐의 쉬는 시간을 제하면 명은이는 그 시간동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힘든 기색 하나 보이지 않을까요. 한번은 힘들지 않으세요? 하고 물어봤지만... 네, 괜찮아요. 라는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항상 정말로 힘들지 않은 것처럼 가만히 있을 줄 알았고요.
그림을 그리기엔 완벽했으나 정물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까지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죠. 명은이는 그래서 어려운 모델이었습니다. 명은이는 벨벳 드레스 밑으로 근육이 긴장하고 풀어진 정도까지 가늠하는 준호의 눈을 마주하고도 피하는 법이 없어요. 눈빛을 받아내는 모습이 지나치게 담담하고 당당했습니다. 준호는 오히려 관찰당하는 게 자신인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낍니다. 일방적인 긴장감이 흐 르다 캔버스와 이젤에 막힙니다. 준호는 어느날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초상화는 무얼 위한 그림일까. 저택에 걸기 위함일까, 아니면 혼인을 위한 용도...

한 번도 의뢰인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어쩌면 그림의 목적보다도 자신이 그리고 있는 사람 자체가 궁금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몇 주가 흐릅니다. 명은이에 대한 망상에 빠지느라 손이 더뎌지고, 이내 멈췄더니... 명은이가 눈동자만 움직여 준호를 응시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처럼. 그 눈을 마주친 순간 준호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맙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내뱉어요. 자세를 바꿀까 싶어서요. 이젤과 의자 사이가 이렇게 멀었던가요. 여전히 처음과 같은 자세를 한 명은이가 가만히 준호를 기다립니다. 준호는 조금 떨리는 손으로 드레스의 주름을 다듬 고, 의미 없는 동작이 모두 끝난 뒤에야 본래의 목적으로 향합니다. 잠시, 손을 건드려도 될까요? 늘 들었던 네 글자가 들립니다. 괜찮아요. 그림을 그리는 몇십 시간 동안 숨겨져 있던 왼손을 그제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왼손 약지는 상처도, 반지도 없이 깨끗합니다. 준호는 순간 안심하는 동시에 혼처의 존재 여부에 대해 생각합니다. 쉽게 내어지지 않을,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는 것은 자신이 잡은 손의 부드러움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명은이는 준호의 행동을 관찰합니다. 이제 와서 자세를 바꿔도 되나요. 가까이서 듣는 목소리는 훨씬 또렷하고 곧았습니다. 두 손이 모두 보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확신 없이 대답한 준호는 명은이의 손을 내려 놓습니다. 명은이는 손의 위치만 바뀐 채로, 여전히 같은 포즈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조각이나 인형 같네요. 준호는 그제서 야 피그말리온의 기분을 이해합니다. 나의 요구가 아닌 온전한 그의 의지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목소리를 통해 알고 싶습니다. 손톱이 가지런한 것은 알아도 연인이 있는지, 초상화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고 있잖아요. 궁금증은 사라지기는커녕 갈수록 불어나기만 하네요.

준호는 명은이의 비밀을 다 알아내기 전까지 아무것도 그려낼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속으로 탄식합니다. 이 초상화의 의뢰인에게 완성이 늦어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야 하거든요. 들고 있던 목탄을 툭 내려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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