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신세지는 소금빵님의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타입입니다. >//<
준호는 기차에 앉아서 커피를 마십니다. 수험생 때만 해도 카페인을 굳이 들이붓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오히려 직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커피를 마시는 나날이 늘어만 갑니다.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도 캔 커피를 마실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작은 카페에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할 때도 있어요. 크림이나 설탕은 안 넣으시나요? 네, 괜찮습니다. 요즘 화이트 푸드를 줄이는 중이거든요. 준호는 스트레칭을 하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역사 시험이 어렵다고 했지만 시험 기간 내내 죽어가는 건 인터넷으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 선생님도 피차 일반이니까요. 그렇지만 선생님이 이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면 안 되겠지. 준호는 달력에 빨갛게 물들여진 글자를 봅니다. 이 시험이 끝나면 연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당첨 된 크루즈 쿠폰을 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커피 쿠폰과 크루즈 쿠폰을 동시에 당첨 받았는데 전화를 받았을 땐 농담인 줄 알고 끊어버릴 뻔 했죠. 라디오 작가의 필사적인 외침 덕분에 무사히 받을 수 있었습니다. 크루즈라,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는 낯선 교통 수단이군요. 정말 배에서 음악회를 열고 마술쇼를 여는 것이 가능하다니. 밤바다에서 환상적인 선상의 불꽃놀이라고 적혀 있는 홍보물을 보면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름날 축제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한 것도 제법 옛 일이 되었단 말이죠. 아이들의 시험이 끝나면 선생님의 휴가도 찾아오니, 준호는 시험 범위가 너무 넓다면서 떼쓰는 아이들을 친절히 타일러가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커다란 크루즈를 보며 준호는 약간 주눅 들어 있습니다. 여전히 커피 한 캔을 사 들고 있네요. 편의점이나 지하철 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보틀 모양의 캔 커피는 무난한 맛을 보장해줍니다. 블랙과 라떼가 있다면 준호의 선택은 늘 블랙이었죠. 그렇게 습관처럼 블랙 커피를 챙기는 준호는 제법 어른이 된 것 같군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선 안내 받은 객실로 들어가자 아늑한 공간이 보입니다. 동행인과 함께 왔다면 즐거웠겠지만 연애를 한 것도 제법 오래 지난 일이라서 스스로가 머쓱해지네요. 캐리어를 한 쪽 구석에다 두고 음악회가 있다는 곳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깁니다. 저녁 식사 이후에 있다고 했으니 아직은 한산하려나 싶은 마음으로 이곳 저곳 둘러 보는데 무대 위에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준비 중인 스태프인가 싶어 준호는 멀찌감치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였는데, 웬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와요. 다름 아닌 명은이의 목소리. 명은이는 무대 위에서 자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리아? 아니면 무슨 넘버인가. 호기심이 동한 준호는 손에 커피를 쥔 채 무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군요.
혹시 가수이신가요? 준호가 먼저 묻자 이쪽으로 올 줄 몰랐다는 듯 명은이는 환하게 웃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견습이에요. 견습. 명은이는 무대에 걸터앉은 채 제 쪽으로 다가오는 준호에게 손을 뻗습니다. 준호는 얼떨결에 손을 내미는군요. 처음 만나는 이와 이렇게 손을 잡은 것은 얼마만이었을까요. 명은이는 짖궂은 웃음을 지으면서 준호를 끌어당깁니다. 무대에 바짝 다가서게 된 준호는 생글거리는 명은이의 얼굴을 올려다 봐요. 그러니까, 사실은 여기로 올 게 아니었는데 불시착을 해버렸지 뭐예요. 나도 참 바보 같기는. 혹시 예매를 잘 못 하셨나요? 준호의 물음에 명은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시 웃습니다. 그런 셈이죠. 계획을 잘못 세웠어요. 준호는 안경을 올리면서 말을 고릅니다. 역시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쾌활하고 거침없고. 준호 역시 휴가 계획을 잘못 세운 바람에 홋카이도 대신 후쿠오카로 날아가버린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 땐 정말 아찔했어요. 눈을 보고 싶었지만 온천을 했으니 그걸로 됐지만. 혹시 가고 싶었던 곳은 다른 지역이셨나요? 명은이는 대답 대신 빙글 돌며 무대 위에서 다시 높은 목소리로 노래를 합니다. 어지간히도 밝은 마이 페이스의 사람이구나. 휴가의 즐거움은 또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지 않겠어요? 늘 학원에서 교복 입은 아이들과 수험을 향해 달려가는, 스타 강사 역사 권 준호 선생님은 새로운 만남에 목말랐을 지도 모릅니다. 자유롭게 무대 위에서 흐르듯 날아다니고 노래하는 명은이는 준호의 눈에 비친 이제껏 새로운 영혼이었으니까요.
견습이라면 정식이 되기까지 아직 기간이 남은 건가요? 정식이 된다면 분명 멋지실 겁니다. 무대와 아주 잘 어울리는 노랫소리예요! 명은이는 눈을 접어서 웃습니다. 말할 수 없는 건 노래로 답하면 되니 노래를 부릅니다. 사실 명은이는 불시착한 것에 가까웠거든요. 원래 도착하려던 곳은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떠도는 천사라니 제법 으스스하지 않나요? 물론 명은이는 스스로를 아직까지 천사보다는 유령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요. 전생의 기억은 아예 없습니다. 그렇지만 노래하는 것이 좋았고 춤추는 것도 좋았어요. 이왕 불시착한 거 즐겁게 보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간이 무대 위에 올라서서 부를 수 있던 노래를 소리 내어 부른 것뿐. 정식 천사가 되려면 인간 세상을 관찰하고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 감정을 느껴도 좋으니 많이 만나봐야 한다고 했어요. 인간의 눈에 보일지 안 보일지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고 했던 것 같은데 명은이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죠. 보여도 재미있고, 안 보여도 재미있을 테니까. 딱히 인간 세상 자체에 애착은 없지만 재미있고 흥미로운 일이 넘친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니겠어요? 때문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준호는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간이 무대를 둘러보러 왔다니 궁금한 게 많은가? 싶으면서도 옷 차림을 보면 그저 평범했거든요. 역시 어른이 되면 사람들은 따분해지는 걸까나. 그렇지만 노래하고 춤추면 이렇게 금새 즐거운 얼굴을 하거든요. 준호에게 있어서 이 만남은 기억 상자에 즐겁게 남게 될 추억일 테고요.
오늘 음악회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나오시지 않으시는 건가요? 명은이의 손에 이끌려 몇 번이고 엉망진창인 스탭을 밟던 준호는 멈춰서며 묻습니다. 명은이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해요. 그리고 빙글 돌면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불러주겠다면서 다시금 새로운 노래를 부릅니다. 준호는 모두 처음 들어본 노래에 가깝지만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 함께 다시 엉망진창의 스탭을 밟습니다. 마치 호두까기 인형처럼요. 인간들의 무대를 어지럽힐 생각은 없었지만 잠시 장난을 치는 건 괜찮겠지. 이 녀석을 위해서. 음악회가 끝나면 불꽃 놀이가 있을 테니까 그 때라면 나올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면서 명은이는 이번엔 준호의 손을 잡고 준호를 빙글 돌립니다. 넘어질 뻔하던 준호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아요. 그리고선 알루미늄 캔 커피 뚜껑을 엽니다. 한 모금 하려다가 여태까지 노래하던 건 명은이라는 생각에 커피를 건네는 군요. 커피, 괜찮으신가요? 블랙이긴 하지만. 명은이는 흔쾌히 받아 들고선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 계속해서 커피를 마십니다. 그리곤 뚜껑을 닫아요. 아, 이런. 내가 다 마셔버렸네. 조금 민망해하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준호는 어딘가 안심이 되어서 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도 인간적인 모습이 있구나 하던 것이었죠. 내내 마치 요정처럼 높은 텐션을 유지했으니까.
그럼 밤에 보기로 해요. 역시 라떼가 더 좋았을까. 블랙은 입에 너무 썼을 텐데. 준호는 방에 돌아와서도 음악회 팜플렛을 보며 선상에 나가 바다를 보면서도 이 순간이 마치 꿈처럼 느껴져요. 만날 수 없을 사람을 만난 기분. 새로운 만남은 모두 이렇게 두근거리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있던 준호는 뜻밖에 휴가를 보내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참 운세가 좋았단 말이죠. 커피와 크루즈라니. 혼자서 기분이라도 내 보자는 마음으로 준호는 불꽃 놀이가 가장 잘 보일만한 곳에 서요. 음악회가 시작되고 명은이가 아닌 다른 가수가 익숙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명은이가 불렀던 곡은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감이 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뜬 준호는 불꽃 놀이가 펼쳐질 곳으로 다시금 시선을 돌립니다. 그곳에는 익숙한 모습의 여자가 있어요. 명은이는 노래를 부릅니다. 음악회가 열리는 곳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낮은 첼로에 알맞게 노래를 부릅니다. 준호는 안경을 한 번 올리고 그곳을 다시 바라보아요. 그곳을 보고 있는 사람은 저 뿐이겠지요. 이 노래가 끝나면 내가 만난 천사는 사라질 걸 알고 있어요. 첼로의 음이 맺어집니다. 불시착한 천사는 다시금 본래의 자리로 날아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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