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ling you, Darli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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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3. 6. 9. 12:48
작성자
Clockwork1overs
imnotsnowman님 커미션

[百日] 발자국

준호야.

나직한 목소리에 준호는 잠에서 깼다. 커튼 사이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 분명했다. 시계를 더듬어 찾는 준호를 두고 명은이 재차 말을 걸어온다. 나가자.

어디로? 질문은 졸음에 삼켜지고 몸만 저절로 움직였다. 명은은 이미 외투까지 걸친 채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준호의 잠옷-저녁부터 입고 있었던-에 소라게가 그려진 것은 우연이었을까?

두 사람은 바닷가를 걷는다. 새해 같은 특별한 날도 아니고, 관광객이 일출을 보기 위해 찾는 부류의 바다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에 광활하고 어두운 해변에 사람이라고는 둘 뿐이었다. 멀리까지 걷고 또 걸었다. 명은이 불편하다며 벗어둔 신발이 바위처럼 보이다가, 모래알처럼 보이다가, 이젠 그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불청객에게 상냥하지 못한 소금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초겨울의 날씨임에도 제법 날카로웠다. 명은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준호는 앞서 걷는 선배의 뒷모습을 본다.

- 무슨 생각 하세요?
- 딱히, 아무것도... (그저 파도를 응시할 뿐이다.)
- 이런 풍경을 보면 모든 일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라고 만들어진 것처럼 움직이잖아요, 규칙적으로.
- 중력의 영향이야.
- 사람에게도 정해진 운명이 있을까요?

운명을 믿으세요? 모래사장에 새겨지던 발자국이 끊긴다. 그것을 따라 밟던 준호 또한 걸음을 멈췄다. 매끄러운 발자국 위로 그것보다 큰 신발 밑창의 결을 덧그리고 있었다. 명은이 몸을 돌리자 내내 바람결에 파묻혀 있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런 건 없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인연이 되기로 직접 선택한 거야. 그걸 감히 운명 같은 불확실한 말로 칭하면 안 돼.

심각한 표정을 한 명은을 두고 준호는 소리를 내어 웃는다. 바다는 이 기이한 광경을 보고도 비웃지 않는다. 파도는 두 사람이 내는 소리를 깡그리 덮어버릴 것처럼 밀려오다가 곧 힘없이 빠져나간다. 준호는 명은에게 자주 보여주는, 그녀가 좋아하는 미소를 지은 채 입을 열었다.

- 선배.
- 응.
- 이럴 땐 그냥 앞으로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잠깐의 정적. 파도가 두 번 정도 모래를 적셨다. 너도 신발 벗어. 모래의 감촉이 좋아. 말 돌리지 말고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준호는 명은이 건네는 손을 잡았다. 차가운 소금기를 머금은 손가락이 하나로 얽힌다.

돌아갈까요? 옷자락이 젖었어. 차에 가서 말려야겠어요. 두 사람은 막 동이 터오는 풍경을 뒤로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파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태양엔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수면과 평행하게 걷는다. 명은은 함께 걷던 준호가 고개를 돌려 일출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함께 감상에 젖지 않는다. 영원히 반복될 공전과 자전을 바다에서 지켜본다고 해서 크게 다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앞서가지 않고 걷는 속도를 늦추었다.

돌아가는 길의 발자국은 네 줄이다.
나란히, 규칙적으로.



898님께서 밤바다를 그리려다가, 밤보다는 새벽이 어울릴 것 같아 그렇게 그렸다는 코멘트를 남겨주셨기 때문에! 둘이 왜 바다를 보러 가게 되었는지는 제 몫이 되었습니다. 즐거웠어요. 분명 목적이 있었는데 결국 '왜' 갔는지는 잘 모르는 글이 되어버렸네요. 명은이의 즉흥적인 감정 때문일 수도, 준호의 소라게 티셔츠 때문일 수도... 
 
이 이야기의 시점은 어떤 주말의 아침인데, 두 사람이 연인이 되고 함께 살기 시작한 이후입니다. 당연히 직장인이고... 명은이 같은 경우는 운전면허와 차도 있어요. 준호와 만나기 전부터 가끔씩 무언가를 참을 수 없을 때마다 혼자서 바다를 보러 갔을 것 같아요. 예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바다 근처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주기적으로 바다를 보아야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야기에서 파생된 그런 설정입니다. 준호에게는 뜬금없는 제안이었겠지만 명은이에게 있어 이 수상한 바다 산책은 일종의 초대였습니다. 나의 일상에 너를 끼워 넣고 싶다는 투박한 의사 표현이죠. 서로가 서로의 어떤 부분들을 먼저 눈치채고 있는데, 정작 상대가 뭘 눈치챘는지는 모르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네요.
 
제가 여러번 봤던 뮤지컬에서 연인끼리 사랑을 확인하며 '우린 다르지 않아, 사실 완벽히 같아.'라고 노래하는 넘버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 두 사람의 경우에는 완벽하게 다르기 때문에 어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바다에서 일출을 보며 운명을 믿는 남자와 바다에서 파도를 보고 운명을 믿지 않는 여자.
 
명은이는 복잡한 사람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냐 물을 땐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투명한 사람인 동시에, 사랑을 고백하는 건 어려워하고, 동시에 중력 때문이라고 답하는 무드 없는 사람이기도 하고... 명은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속을 알 수 없는 여자라고 평가하겠지만, 그녀를 오래 지켜본 준호라면 분명 무슨 말을 하든 뜻을 알아줄 것 같았어요. 명령조의 말투나, '감히'라거나 '안 돼'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연상의 특권입니다. ㅋㅋ 
 
이 글을 백일 기념으로 올릴 생각은 없었다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고 힘을 내서 완성해봤네요. 아직 부족한 것 같다만 더 붙잡는다고 나아질 것 같지도 않아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사실 엄청 오래전부터 쓰고 있던 글인데, 좋아하는 친구가 최근에 써준 글(아마도 나중에 슬쩍 공개할 듯)과 하려는 이야기의 결이 비슷해서 놀랐어요. 남들 눈에도 준호와 명은이가 이런 분위기로 보였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
 
드림을 시작한지 벌써 세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니... 이렇게 두 번 그리고 반을 더하면 눈 깜짝할 새에 일 년이 되겠네요. 기념일을 꾸준히 챙길 수 있기를... 그리고 바다 산책이 즐거웠기를 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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